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난두 주디첼리 (문단 편집) === 클럽 === 주디첼리는 이탈리아계 혈통으로 알려져 있다. 그는 그 당시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 잘 나가던 클럽인 아메리카-RJ에서 데뷔했고, 1927년에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하였다. 주디첼리는 4시즌 동안 81경기라는 다소 적은 경기에 출전했지만 출전 경기에서는 57승을 거둘 정도로 승률이 좋았다. 하지만 거기까지였다. 나머지 경기에서 잘 풀리지 않으니 플루미넨시 팀 자체는 좋은 성적을 거둘 리 만무했다. 1931년, 주디첼리는 [[닐루(축구선수)|닐루]], [[카르발류 레이치]] 등과 [[CR 바스쿠 다 가마]]의 유럽 투어에 참가하였다. 바스쿠 다 가마는 [[스페인]]과 [[포르투갈]] 등지를 돌며 [[FC 바르셀로나|바르셀로나]], [[FC 포르투|포르투]], [[SL 벤피카|벤피카]], [[스포르팅 클루브 드 포르투갈|스포르팅 리스본]] 등과 12차례 시합을 가졌고, 그 중 8차례 승리를 거두었다. 투어가 그렇게 끝날 무렵, 주디첼리는 유럽에 남겠다는 선언을 하였다. 당시 브라질은 프로화가 되어있지 않았던 관계로 그것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[[오리운디]]임을 이용하여 [[토리노 FC]]로 이적하였다. 그는 첫 시즌에 28경기의 출전 기록을 남기는 등 토리노에서의 생활에 나름 만족했지만 거칠었던 축구계에는 다소 플레이 스타일이 맞지 않는 선수였다. 당시 세계 최고의 하프백으로 평가받던 [[루이스 몬티|몬티]]나 [[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|안드라데]]는 엄청난 운동량은 기본에 몬티는 그에 더해 승부욕과 거친 수비로 명성을 떨치던 선수였고 감독들 대부분이 그런 선수를 선호했다. 그 때문에 다음 시즌에는 12경기로 출전 횟수가 줄었고 2년만에 토리노 생활을 정리하게 된다. 1933년에는 스위스의 영 보이스로 이적했고 겨울 휴식기에는 잠시 아메리카-RJ에서 뛰기도 했다. 1934년부터는 [[FC 지롱댕 드 보르도|보르도]]에서 보냈고 휴식기 동안에는 계속 유럽으로 이적을 원하는 남미 선수들에게 다리를 놓아주었다. 하지만 이탈리아가 [[제2차 이탈리아-에티오피아 전쟁]]에 휘말리게 되었다. 그 때문에 계획했던 선수 수급을 마치지 못하게 되었으며 [[스포르팅 클루브 드 포르투갈|스포르팅 리스본]]으로 이적하였다. 하지만 그는 이 팀에서는 단 한 경기 밖에 뛰지 못했고, [[레알 마드리드 CF|레알 마드리드]]로 이적하였다. 여기서도 그는 [[레알 라싱 클루브 데 산탄데르|라싱 산탄데르]]를 상대로 단 한 경기밖에 뛰지 못했다.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던 [[프란시스코 브루]]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. 결국 주디첼리는 프랑스의 앙티브로 팀을 옮기게 되었고 2년간 29경기에 출전, 8골을 기록하면서 나름 좋은 활약을 펼치며 커리어를 마무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